2007년 02월 04일
[위대하신 드래곤 슬레이어 나으리] -1
며칠 전부터 조금씩 구상했던 짧은 단편입니다. 판타지물이지요. 제가 블로그에다 판타지물을 쓰는 건 아마 처음인 듯합니다. 사실 저, 장르문학이라면 웬만하면 다 좋아하거든요. 제게 지금 가장 좋아하는 작가 세 명을 꼽으라면 폴 오스터,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로저 젤라즈니가 들어갑니다.
여튼 각설하고, [유쾌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마도 3부작으로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편이지요. 즐겁게 읽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덧: 제목 살짝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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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로 밥을 먹고 있던 쉬바르노므스키 후작 원턴 테레스티니얼 델 아비트레이는 중간 정도로 구워진 염소 허벅지 고기를 먹다 말고 입을 쩌억 벌리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을 정도였다.
“프란스 놈이 말인가!”
거의 비명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가 식당을 쩌렁쩌렁 뒤흔들었다. 입 안에 들어있던 염소 허벅지 고기가 다량의 침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날았다. 그러나 쉬바르노므스키 후작 가문에서 사십일 년 동안 근무하며 삼 대에 걸친 주인을 모셔온 충실한 집사는, 씹다 만 고기가 얼굴에 덕지덕지 들러붙는대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않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쉬바르노므스키 후작 원턴 테레스티니얼 델 아비트레이, 간단하게 줄여서 원턴은 한참 동안이나 멍한 얼굴로 집사를 쳐다보다가 문득 왼손을 내저었다.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재빨리 다가와 식탁 위의 음식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집사가 가져다준 소식이 원턴의 왕성한 식욕마저 저하시킨 모양이었다. 원턴은 비대한 몸을 일으켜 자신의 방으로 뒤뚱뒤뚱 걷기 시작했다. 충실한 집사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뒤에 남은 하녀들은 오늘은 주인님이 평소의 절반밖에 식사를 하지 않았다느니, 그래서 설거지할 게 줄어서 좋다느니 하면서 저희들끼리 시시덕거렸다.
방으로 들어간 원턴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삐걱거리면서도 간신히 원턴의 몸을 받쳐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믿기 어렵지만,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엄청난 일이었다. 드래곤이란 어떤 존재던가? 인간을 한없이 웃도는 위대한 지성과, 일 개 사단쯤은 일순간에 날려버릴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 멍청한 프란스, 그러니까 바랑가진 공작 프란스 유크셔테리어 스트리던트 따위가 감히 드래곤을 물리쳤다니! 한참 동안 혼자 씨근덕거리던 원턴은 집사에게 눈길을 돌렸다.
“용의 이빨은 가져왔다고 하는가? 용의 이빨을 가져오지 않고서야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할 수 없지.”
그렇게 묻는 원턴의 눈에는 어떤 간절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집사의 침착한 대답은 원턴이 지니고 있었던 일말의 기대마저 일순간에 박살내 버렸다.
“가져오셨다고 합니다. 족히 다섯 뼘을 훨씬 넘는 길이라고 들었습니다. 물론 부풀려졌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말도 안 돼! 프란스 따위가 어떻게!”
원턴은 버럭 화를 내면서 대뜸 팔걸이를 내리쳤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드래곤 슬레이어! 드래곤을 물리친 자.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이 세계에서 지닐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칭호가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였다. 또한 어릴 때부터 들어온 전설적인 용자와 마법사들의 모험담에 마음을 빼앗긴 청년들의 한결같은 꿈이야말로 바로 드레곤 슬레이어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무수한 청년들이 드래곤을 물리치기 위해 말 한 필에 몸을 싣고 드래곤의 거처로 용맹스레 달려가곤 했다. 물론 그들 중 대부분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씩, 정말 가끔씩 돌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와의 생사를 건 결투 끝에 승리한 그들은 승리의 징표로 드래곤의 이빨을 뽑아 돌아왔다. 드래곤이란 워낙에 커다란지라, 시체를 들고 올 수는 없어 대신 이빨을 뽑아 오는 것이었다.
그 이빨을 들고 돌아온 드래곤 슬레이어의 명성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바쳐지는 찬사와 일신에 쏟아지는 명예는 일국의 왕을 능가했다. 생각해보면 그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릇 왕이라면 세계 여러 나라에 언제나 두루 존재하기 마련이었지만, 드래곤 슬레이어는 한 세대에 한 명이 나오기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원턴이 알기로 가장 최근의 드래곤 슬레이어는 73년 전의 쉬바르노므스키 후작, 즉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였다. 일개 평민이었던 그는 사흘 밤낮에 걸친 사투 끝에 드래곤을 물리치고 돌아와 드래곤 슬레이어의 칭호를 받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당시의 국왕은 그에게 후작 작위를 내리고 자신의 둘째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새로이 탄생한 드래곤 슬레이어의 용기와 명예에 보답했다. 지금도 쉬바르노므스키 후작가의 응접실에는 그 때 그가 들고 온 드래곤의 이빨이 장식되어 있는데, 그 길이가 네 뼘을 훨씬 넘었다. 그 이후로 7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드래곤 슬레이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지금, 바랑가진 공작 프란스 유크셔테리어 스트리던트가 드래곤을 물리쳤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었다.
게다가 다섯 뼘이라니, 증조할아버님이 가져온 드래곤의 이빨보다 길지 않은가! 원턴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덩치가 클수록 강한 드래곤이라는 건 세 살배기 아이도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이빨 길이는 당연히 드래곤의 덩치에 비례했다. 그러니 새로이 드래곤 슬레이어가 된 프란스의 명예는 더욱 드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된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원턴은 대뜸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나 침착한 쉬바르노므스키 가문의 집사는 놀라서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원턴이 그토록 의자에서 빨리 일어난 것은 살이 찌기 시작한 여섯 살 이후로 16년만의 일이었다.
“집사, 마차를 준비하게.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마차가 바랑가진 공작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자 원턴은 마차에서 내렸다. 급한 마음에 발을 헛디딜 뻔했지만 다행히도 집사가 옆에서 붙들어 주었다. 원턴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응접실의 문을 열어젖히자, 바랑가진 공작가의 젊은 주인은 얼굴에 가득한 함박웃음으로 원턴을 맞이했다. 바랑가진 공작 프란스 유크셔테리어 스트리던트는 남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삐쩍 마른 체격에 키만 멀대처럼 크고 그야말로 볼품없이 생겨서, 피둥피둥 살이 쪄서 남들의 두 배는 됨직한 데다 땅딸막하기까지 한 원턴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허허 이런. 쉬바르노므스키 후작이 아니시오?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오시면 체통이 없어 보이지 않소이까.”
“시끄럽네, 프란스.”
원턴은 툴툴거렸다. 동갑내기인 원턴과 프란스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물론 이것이 꼭 지금도 친구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기는 조금 곤란하다. 알다시피 친구란 참 끈끈하면서도 의외로 쉽게 갈라지는 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원턴은 격식을 차리지 않은 채 프란스의 이름을 부를 만한 자격이 있었고 프란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턴은 의자에 앉자마자 내뱉듯 말했다.
“자네가 드래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사실인가?”
“이런. 벌써 소문이 퍼졌나? 이거 참 민망하구먼.”
프란스는 짐짓 놀랐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실상 그는 돌아오자마자 저택의 하인 백스물여섯 명에게 명령해 자신이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었다는 사실을 널리 퍼뜨리라고 명령한 터였다. 물론 그 사실을 짐작하지 못할 원턴이 아니었다. 원턴은 콧방귀를 끼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드래곤의 이빨을 구경시켜 줄 수 있겠나?”
원턴은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은 눈길로 프란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만일 프란스가 드래곤의 이빨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필경 그가 드래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도 거짓일 터였다. 실제로 그런 짓을 했던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만큼 프란스에게 드래곤의 이빨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를 드래곤 슬레이어로 인정하지는 않은 것이라고 원턴은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턴의 바람과는 달리, 프란스는 싱긋 웃으며 승낙했다.
“물론이지. 여보게, 집사. 드래곤의 이빨을 가져와서 쉬바르노므스키 후작께 보여 드리게.”
잠시 후 바랑가진 공작 가문의 집사가 두 손으로 상자를 받들고 돌아왔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길쭉한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집사는 탁자 위에 상자를 내려놓은 후 경건한 자세로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쪽을 둘러싼 붉은 비단 위에, 드래곤의 이빨이 놓여 있었다. 흘끗 본 것만으로도 원턴은 알 수 있었다. 그건 진짜였다. 자신의 응접실 거실에 걸려 있는 것과 거의 흡사한 모양의 이빨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확실히 조금 더 컸다.
원턴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쥔 채 머리를 떨구었다. 집사는 다시 정성스레 뚜껑을 닫은 후 상자를 들고 나갔다. 프란스는 승리감에 한껏 도취된 모습으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 참 대단한 일전이었네. 정말이지 나도 내가 목숨을 잃는 줄 알았지 뭔가. 드래곤의 날갯짓 한 번에 몸이 날아가고, 드래곤의 숨결에 머리카락이 그을릴 때는 죽음의 신이 눈앞에 얼른얼른하는 듯했지. 하지만 다행히도 이겨낼 수 있었다네. 민첩하게 말에서 뛰어내린 덕분에 나는 드래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네. 아마 자네처럼 뚱뚱한 사람에게는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군. 허허, 농담이니 너무 괘념치 마시게나. 하지만 그 때문에 내 충실한 말이 죽은 건 정말 슬픈 일이야. 그리고 내가 용의 계곡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돌아와야만 했던 것도. 그나저나 내가 이렇게 검을 들고 내리친 순간 드래곤의 비명소리란 참 대단했지! 자네도 그 소리를 들었더라면 깜짝 놀랐을 걸세. 뭣보다도 글쎄.......”
그러나 원턴의 귀에는 이미 프란스의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프란스가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드래곤의 이빨이, 그것도 뽑아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유황과 피 냄새가 뒤섞인 드래곤의 이빨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명백한 증거였다. 망할. 원턴은 그의 고상한 작위와 지위에 맞지 않는 육두문자를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의 눈앞을 스쳐간 것은 한 아리따운 아가씨의 웃음 띤 얼굴이었다. 레오나. 원턴은 멍하니 입 속으로 되뇌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마음씨 착한 처녀의 이름이었다.
셋은 동갑내기였고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적어도 원턴과 프란스 둘 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사 년 동안 둘은 그녀에게 구애를 반복하고 있었다. 프란스가 비단 손수건을 선물하면 원턴은 모피 모자를 선물하고, 원턴이 루비 반지를 선물하면 프란스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하는 식이었다. 젤라즈니 자작 가문의 외동딸인 그녀는 두 친구의 열렬한 애정 공세 사이에 껴서 움쩍달싹 못하고 있었다. 상냥하기 그지없는 그녀로서는, 자기 때문에 오랜 두 친구의 사이가 갈라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두 친구가 서로 자신이 상대보다 낫다고 주장하며 서로를 깎아내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둘을 화해시키기 위해 농담 삼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둘 중 하나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면 나는 그 사람과 결혼할게. 그러니까 나 때문에 서로 다투지 말아 줘.”
그녀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통에 원턴과 프란스는 말싸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약 일 년 전의 일이었다. 그 이후로 둘은 눈에 띌 정도로 심하게 다투지는 않고 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에 비한다면 그 어떤 명예와 부유함도 한낱 티끌에 지나지 않으니 누가 더 잘났냐고 해 봤자 겨우 도토리 키 재기밖에 되지 않는 노릇이었다. 레오나의 중재가 빛을 발한 셈이었다.
그런데 한 달쯤 전에 갑자기 프란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었다. 레오나는 물론 어릴 때부터의 소꿉친구를 몹시 걱정했고, 원턴도 라이벌이 사라진 것을 기뻐하면서도 나름대로는 조금쯤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라진 프란스가, 놀랍게도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여튼 각설하고, [유쾌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마도 3부작으로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편이지요. 즐겁게 읽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덧: 제목 살짝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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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로 밥을 먹고 있던 쉬바르노므스키 후작 원턴 테레스티니얼 델 아비트레이는 중간 정도로 구워진 염소 허벅지 고기를 먹다 말고 입을 쩌억 벌리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을 정도였다.
“프란스 놈이 말인가!”
거의 비명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가 식당을 쩌렁쩌렁 뒤흔들었다. 입 안에 들어있던 염소 허벅지 고기가 다량의 침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날았다. 그러나 쉬바르노므스키 후작 가문에서 사십일 년 동안 근무하며 삼 대에 걸친 주인을 모셔온 충실한 집사는, 씹다 만 고기가 얼굴에 덕지덕지 들러붙는대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않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쉬바르노므스키 후작 원턴 테레스티니얼 델 아비트레이, 간단하게 줄여서 원턴은 한참 동안이나 멍한 얼굴로 집사를 쳐다보다가 문득 왼손을 내저었다.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재빨리 다가와 식탁 위의 음식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집사가 가져다준 소식이 원턴의 왕성한 식욕마저 저하시킨 모양이었다. 원턴은 비대한 몸을 일으켜 자신의 방으로 뒤뚱뒤뚱 걷기 시작했다. 충실한 집사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뒤에 남은 하녀들은 오늘은 주인님이 평소의 절반밖에 식사를 하지 않았다느니, 그래서 설거지할 게 줄어서 좋다느니 하면서 저희들끼리 시시덕거렸다.
방으로 들어간 원턴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삐걱거리면서도 간신히 원턴의 몸을 받쳐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믿기 어렵지만,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엄청난 일이었다. 드래곤이란 어떤 존재던가? 인간을 한없이 웃도는 위대한 지성과, 일 개 사단쯤은 일순간에 날려버릴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 멍청한 프란스, 그러니까 바랑가진 공작 프란스 유크셔테리어 스트리던트 따위가 감히 드래곤을 물리쳤다니! 한참 동안 혼자 씨근덕거리던 원턴은 집사에게 눈길을 돌렸다.
“용의 이빨은 가져왔다고 하는가? 용의 이빨을 가져오지 않고서야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할 수 없지.”
그렇게 묻는 원턴의 눈에는 어떤 간절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집사의 침착한 대답은 원턴이 지니고 있었던 일말의 기대마저 일순간에 박살내 버렸다.
“가져오셨다고 합니다. 족히 다섯 뼘을 훨씬 넘는 길이라고 들었습니다. 물론 부풀려졌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말도 안 돼! 프란스 따위가 어떻게!”
원턴은 버럭 화를 내면서 대뜸 팔걸이를 내리쳤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드래곤 슬레이어! 드래곤을 물리친 자.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이 세계에서 지닐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칭호가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였다. 또한 어릴 때부터 들어온 전설적인 용자와 마법사들의 모험담에 마음을 빼앗긴 청년들의 한결같은 꿈이야말로 바로 드레곤 슬레이어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무수한 청년들이 드래곤을 물리치기 위해 말 한 필에 몸을 싣고 드래곤의 거처로 용맹스레 달려가곤 했다. 물론 그들 중 대부분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씩, 정말 가끔씩 돌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와의 생사를 건 결투 끝에 승리한 그들은 승리의 징표로 드래곤의 이빨을 뽑아 돌아왔다. 드래곤이란 워낙에 커다란지라, 시체를 들고 올 수는 없어 대신 이빨을 뽑아 오는 것이었다.
그 이빨을 들고 돌아온 드래곤 슬레이어의 명성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바쳐지는 찬사와 일신에 쏟아지는 명예는 일국의 왕을 능가했다. 생각해보면 그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릇 왕이라면 세계 여러 나라에 언제나 두루 존재하기 마련이었지만, 드래곤 슬레이어는 한 세대에 한 명이 나오기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원턴이 알기로 가장 최근의 드래곤 슬레이어는 73년 전의 쉬바르노므스키 후작, 즉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였다. 일개 평민이었던 그는 사흘 밤낮에 걸친 사투 끝에 드래곤을 물리치고 돌아와 드래곤 슬레이어의 칭호를 받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당시의 국왕은 그에게 후작 작위를 내리고 자신의 둘째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새로이 탄생한 드래곤 슬레이어의 용기와 명예에 보답했다. 지금도 쉬바르노므스키 후작가의 응접실에는 그 때 그가 들고 온 드래곤의 이빨이 장식되어 있는데, 그 길이가 네 뼘을 훨씬 넘었다. 그 이후로 7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드래곤 슬레이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지금, 바랑가진 공작 프란스 유크셔테리어 스트리던트가 드래곤을 물리쳤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었다.
게다가 다섯 뼘이라니, 증조할아버님이 가져온 드래곤의 이빨보다 길지 않은가! 원턴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덩치가 클수록 강한 드래곤이라는 건 세 살배기 아이도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이빨 길이는 당연히 드래곤의 덩치에 비례했다. 그러니 새로이 드래곤 슬레이어가 된 프란스의 명예는 더욱 드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된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원턴은 대뜸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나 침착한 쉬바르노므스키 가문의 집사는 놀라서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원턴이 그토록 의자에서 빨리 일어난 것은 살이 찌기 시작한 여섯 살 이후로 16년만의 일이었다.
“집사, 마차를 준비하게.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마차가 바랑가진 공작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자 원턴은 마차에서 내렸다. 급한 마음에 발을 헛디딜 뻔했지만 다행히도 집사가 옆에서 붙들어 주었다. 원턴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응접실의 문을 열어젖히자, 바랑가진 공작가의 젊은 주인은 얼굴에 가득한 함박웃음으로 원턴을 맞이했다. 바랑가진 공작 프란스 유크셔테리어 스트리던트는 남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삐쩍 마른 체격에 키만 멀대처럼 크고 그야말로 볼품없이 생겨서, 피둥피둥 살이 쪄서 남들의 두 배는 됨직한 데다 땅딸막하기까지 한 원턴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허허 이런. 쉬바르노므스키 후작이 아니시오?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오시면 체통이 없어 보이지 않소이까.”
“시끄럽네, 프란스.”
원턴은 툴툴거렸다. 동갑내기인 원턴과 프란스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물론 이것이 꼭 지금도 친구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기는 조금 곤란하다. 알다시피 친구란 참 끈끈하면서도 의외로 쉽게 갈라지는 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원턴은 격식을 차리지 않은 채 프란스의 이름을 부를 만한 자격이 있었고 프란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턴은 의자에 앉자마자 내뱉듯 말했다.
“자네가 드래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사실인가?”
“이런. 벌써 소문이 퍼졌나? 이거 참 민망하구먼.”
프란스는 짐짓 놀랐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실상 그는 돌아오자마자 저택의 하인 백스물여섯 명에게 명령해 자신이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었다는 사실을 널리 퍼뜨리라고 명령한 터였다. 물론 그 사실을 짐작하지 못할 원턴이 아니었다. 원턴은 콧방귀를 끼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드래곤의 이빨을 구경시켜 줄 수 있겠나?”
원턴은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은 눈길로 프란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만일 프란스가 드래곤의 이빨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필경 그가 드래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도 거짓일 터였다. 실제로 그런 짓을 했던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만큼 프란스에게 드래곤의 이빨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를 드래곤 슬레이어로 인정하지는 않은 것이라고 원턴은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턴의 바람과는 달리, 프란스는 싱긋 웃으며 승낙했다.
“물론이지. 여보게, 집사. 드래곤의 이빨을 가져와서 쉬바르노므스키 후작께 보여 드리게.”
잠시 후 바랑가진 공작 가문의 집사가 두 손으로 상자를 받들고 돌아왔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길쭉한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집사는 탁자 위에 상자를 내려놓은 후 경건한 자세로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쪽을 둘러싼 붉은 비단 위에, 드래곤의 이빨이 놓여 있었다. 흘끗 본 것만으로도 원턴은 알 수 있었다. 그건 진짜였다. 자신의 응접실 거실에 걸려 있는 것과 거의 흡사한 모양의 이빨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확실히 조금 더 컸다.
원턴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쥔 채 머리를 떨구었다. 집사는 다시 정성스레 뚜껑을 닫은 후 상자를 들고 나갔다. 프란스는 승리감에 한껏 도취된 모습으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 참 대단한 일전이었네. 정말이지 나도 내가 목숨을 잃는 줄 알았지 뭔가. 드래곤의 날갯짓 한 번에 몸이 날아가고, 드래곤의 숨결에 머리카락이 그을릴 때는 죽음의 신이 눈앞에 얼른얼른하는 듯했지. 하지만 다행히도 이겨낼 수 있었다네. 민첩하게 말에서 뛰어내린 덕분에 나는 드래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네. 아마 자네처럼 뚱뚱한 사람에게는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군. 허허, 농담이니 너무 괘념치 마시게나. 하지만 그 때문에 내 충실한 말이 죽은 건 정말 슬픈 일이야. 그리고 내가 용의 계곡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돌아와야만 했던 것도. 그나저나 내가 이렇게 검을 들고 내리친 순간 드래곤의 비명소리란 참 대단했지! 자네도 그 소리를 들었더라면 깜짝 놀랐을 걸세. 뭣보다도 글쎄.......”
그러나 원턴의 귀에는 이미 프란스의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프란스가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드래곤의 이빨이, 그것도 뽑아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유황과 피 냄새가 뒤섞인 드래곤의 이빨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명백한 증거였다. 망할. 원턴은 그의 고상한 작위와 지위에 맞지 않는 육두문자를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의 눈앞을 스쳐간 것은 한 아리따운 아가씨의 웃음 띤 얼굴이었다. 레오나. 원턴은 멍하니 입 속으로 되뇌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마음씨 착한 처녀의 이름이었다.
셋은 동갑내기였고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적어도 원턴과 프란스 둘 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사 년 동안 둘은 그녀에게 구애를 반복하고 있었다. 프란스가 비단 손수건을 선물하면 원턴은 모피 모자를 선물하고, 원턴이 루비 반지를 선물하면 프란스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하는 식이었다. 젤라즈니 자작 가문의 외동딸인 그녀는 두 친구의 열렬한 애정 공세 사이에 껴서 움쩍달싹 못하고 있었다. 상냥하기 그지없는 그녀로서는, 자기 때문에 오랜 두 친구의 사이가 갈라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두 친구가 서로 자신이 상대보다 낫다고 주장하며 서로를 깎아내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둘을 화해시키기 위해 농담 삼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둘 중 하나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면 나는 그 사람과 결혼할게. 그러니까 나 때문에 서로 다투지 말아 줘.”
그녀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통에 원턴과 프란스는 말싸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약 일 년 전의 일이었다. 그 이후로 둘은 눈에 띌 정도로 심하게 다투지는 않고 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에 비한다면 그 어떤 명예와 부유함도 한낱 티끌에 지나지 않으니 누가 더 잘났냐고 해 봤자 겨우 도토리 키 재기밖에 되지 않는 노릇이었다. 레오나의 중재가 빛을 발한 셈이었다.
그런데 한 달쯤 전에 갑자기 프란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었다. 레오나는 물론 어릴 때부터의 소꿉친구를 몹시 걱정했고, 원턴도 라이벌이 사라진 것을 기뻐하면서도 나름대로는 조금쯤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라진 프란스가, 놀랍게도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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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7/02/04 03:15 | 글곰, 글을 연습하다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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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게 웃고 갑니다. 다음편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뭔가 반전을 기대하게 되는데요?ㅋ